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 간섭기 (문단 편집) == [[부마]]국 == [[충렬왕]]이 [[쿠빌라이 칸]]의 막내딸 [[제국대장공주]]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, 원 간섭기 내내 [[고려/역대 왕비|고려의 왕비]] 자리는 [[원나라]] [[공주]]가 차지했다. 충렬왕은 이미 14년 전에 [[정화궁주]]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고 있었으나, 제국대장공주가 시집온 후로 정화궁주는 두번째 비로 강등되었다. 왕위 또한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[[충선왕]]이 이어받았고, 정화궁주의 아들인 [[왕자(고려)#s-2|강양공 왕자(王滋)]]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. 원 간섭기 동안 고려 왕비 자리를 차지한 원나라 공주들은 다음과 같다. * [[제국대장공주]]: [[충렬왕]]의 비 * [[계국대장공주]], 의비(懿妃) 예수진(也速眞, 야속진): [[충선왕]]의 비 * [[복국장공주]], [[조국장공주]], [[경화공주]]: [[충숙왕]]의 비 * [[덕녕공주]]: [[충혜왕]]의 비 * [[노국대장공주]]: [[공민왕]]의 비 원나라 공주들은 자신보다 먼저 고려 왕에게 시집와 있던 고려 여인들을 제치고 왕비가 되었고, 심지어 공주가 아니더라도 [[몽골인]]이면 고려인들보다 우선 순위가 되었다. 예수진은 공주가 아니었지만 몽골인이어서 계국대장공주에 이어 둘째 비가 되었고, 고려인인 정비 왕씨(靜妃王氏), [[조비(고려)|조비]], 순화원비 홍씨(順和院妃洪氏), 순비 허씨(順妃許氏)는 다음 순위로 밀려났다. 이렇게 고려 왕비가 된 [[원나라]]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기세와 횡포가 대단했으며, 남편인 고려 국왕도 업신여겨 함부로 대했다.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원나라 황제의 친딸인[* [[제국대장공주]] 이후의 [[몽골인]] [[왕비]]들은, [[원나라]] 방계 황족의 딸이거나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.] [[제국대장공주]]가 가장 대단했는데, 그녀는 이재에 밝아 고려에서 많은 재산을 모았고, [[흥왕사]]의 귀한 금탑을 빼았기도 했고 나중에 도로 돌려주기는 했다. [[충렬왕]]과 함께 천효사(天孝寺)에 행차했을 때는 자신을 따르는 시종의 수가 적다거나 충렬왕이 자신보다 앞서 갔다는 구실을 들어 충렬왕을 때리기까지 했다. 또한 원나라 공주들의 투기로 인해 가정불화도 끊이지 않았다. [[제국대장공주]]는 [[정화궁주]]가 둘째 비로 밀려난 후로도 계속 정화궁주를 경계하고 질투했다. 심지어 [[충선왕]]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 때도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 때문에 불쾌해하고 화를 내어, 연회가 파토나기도 했다. 결국 정화궁주는 [[충렬왕]]과 떨어져 별궁에 따로 살아야 했고,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한 후에야 다시 충렬왕과 함께 살 수 있었다. 충렬왕에게는 정화궁주 외에도 고려인 [[후궁]]들을 여럿 두고 있었고, 특히 시무비(柴無比)라는 여인에게 푹 빠졌는데, 당연히 이들도 제국대장공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. 1297년 [[제국대장공주]]가 38세에 갑자기 사망하자, [[충선왕]]은 어머니의 죽음이 시무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시무비와 그녀의 측근들을 처형했다. 그러나 충선왕도 (아버지처럼) 왕비 [[계국대장공주]]에게는 소홀한 모습을 보였고 그 대신 고려 여인 [[조비(고려)|조비]]를 총애했다. 이를 질투한 계국대장공주가 친정에 편지를 보내어 고자질하는 바람에 충선왕은 왕위를 아버지에게 내어주고 [[원나라]]로 소환되었으며, 조비와 그녀의 친정 가족들 또한 원나라로 잡혀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. [[충숙왕]]은 먼저 맞아들인 고려인 둘째 비 [[명덕태후|덕비 홍씨]]를 총애하면서 동시에 몽골인 왕비 [[복국장공주]]를 홀대했는데, 이로 인해 충숙왕과 복국장공주는 자주 [[부부싸움]]을 벌였다. 복국장공주는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는데, 애초에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충숙왕이 그녀를 [[가정폭력|종종 폭행했다고도]] 전해진다. 다만 마지막 몽골인 왕비인 [[노국대장공주]]는 [[공민왕]]과 금슬이 좋았고[* 물론 금슬도 좋았지만 공민왕 입장에선 노국대장공주 자체를 반원 개혁에 따른 정적들의 위협을 막는 방패이자 개혁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했다.],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을 지지해주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